전시 EXHIBITION

바람의 무게-#여행자의 시간

2021. 11. 23(화) - 11. 30(화) 10:00 ~ 18:00
임선이 개인전
바람의 무게 #여행자의 시간
1F 아트라운지, B1F 전시실 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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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트 

전시 제목 “바람의 무게- #여행자의 시간”은 시나리오에서 표기되는 scene과 같이 실제 사건을 하나의 scene으로 의미하여 지어졌다. 전시는 어느 날 섬광처럼 찾아온 가족의 죽음과 이를 맞이하는 과정의 시간을 담아 4개의 방으로 나누어 제작되어 졌다. 대전으로 시집와 60여 년을 살아온 한 여성의 생애를 그녀가 남기고 간 유품을 통해 살아왔던 삶의 모습과 시공간에 대한 특정한 기억을 작품으로 풀어내고 있다. 
전시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흐른다. 1층 전시에서 실재를 맞이했다면 지하에 전시된 작품은 부재를 받아들이는 방식과도 같다. 마치 차원을 넘어선 그 무엇을 그려내고 있는 듯 작품은 초현실적인 몽상가의 머리와도 같이 제작됐다.
1층(아트라운지)에 전시되고 있는 “여행자의 시간” 은 사진 작품 시리즈로 그녀와 마지막 여행을 함께했던 가방을 모티브로 삶의 시간을 여행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단초가 되었다. 사진 속 앵글은 그녀가 사용해 오던 오브제들을 통해 고스란히 남아있는 습관과 모습들을 기억해 내고 있으며, 오래된 장롱 속 옷들은 그녀의 신체에 길들어져 있는 shape(형상)을 갖고 있어 부재된 신체의 특정 부분이 비어있는 공간을 담아내고 있다.
어떤 부분은 소매 깃을 통해, 어떤 부분은 하늘하늘한 상체 옷들을 통해, 또 비어있는 하단의 공간을 통해 부재된 신체를 그리워하며 그에 대한 온기를 기억해 내고 있다. 어쩌면 성모상의 모습은 종교적이기보다는 옷 주름을 지닌 또 하나의 온전한 신체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지하 전시실Ⅰ의 “검은 달-달과 그림자가 만나던 날”은 어선의 집어등을 작은 수반에 넣어 제작 됐다. 등대의 신호와 같이 숨을 쉬는 작은 빛에 의해 아래 비치고 있는 흑경과 그림자는 원형이 일치했다 걸쳐있다 하는 모양을 만들어 낸다.
지하 전시실Ⅱ의 작품들은 “새”의 상징을 주로 담고 있다. “흐린 새장과 수천 번의 망치질의 검은 깃털(가제)”이란 작품에선 금속판을 수천 번 망치질하여 만들어 낸 새 깃털의 모습을 반타 블랙으로 도색하여 종이처럼 가벼운 2d에 가까운 형태로 보이게 하였다. 더불어 빈 새장의 모습을 흐릿한 shape(형태)으로 제작되어 졌다. 원형으로 빙빙 도는 새장의 레이어는 공간과 시간을 잃어버린 날아간 새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수천 번 망치질하여 만들어 낸 2d의 새 깃털 모습에서 망치질의 고단한 모습을 잃어버리듯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시선과 인식의 개념에 교란을 일으킨다. 
지하 전시실Ⅲ “초록 우주를 담은 새(가제)”에서는 어떤 전복된 시간의 신호와 지향점을 알 수 없는 빈 공간의 움직임, 몸이 없는 새의 기억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중력을 거스른 원형의 새와 지표면에서 생장하는 이끼들의 대조를 통해 어떤 세상으로 또다시 움직이는 신체 없는 무형의 지향으로 옮겨졌을지도 모른다. 
부재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일 것이다. 전시 “바람의 무게-#여행자의 시간”은 아직 남아있는 부재의 온기를 작가가 애써 기억해 내려는 추적일지 모른다. 그녀는 알싸한 공기의 내음을, 주방에 배어있던 오래된 집의 음식 냄새가, 푹 가라앉은 식탁 의자가 있는 공간에 함께 한다는 것이 소중했을 것이다. 눈을 감으며.... 전시는 공간의 다큐멘터리적인 모습을 통해 부재한 신체와 오브제의 즉물적 모습을 추적하며 삶의 경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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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이전 <바람의 무게-#여행자의 시간>/ 테미예술창작스튜디오
‘어떤 여행자에게’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사 김복수

연한 살굿빛의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제일 먼저 띈 그의 암갈색 나무 액자는 사진과 더불어 중층의 시간과 사건을 안내하는 묘한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정갈하게 고운 이 나무 테두리는 마치 정지된 사진 안 세계를 관통하며 시선의 안팎의 모든 시제를 넘나들게 한다. 미처 정리하지 못해 집안에 널 부려놓은 옷가지와 소소한 일상과 애정이 묻은 사물들, 오래된 옷장 속 몸이 배어있는 옷, 방안에 스며든 빛줄기, 모든 곳에 스민 어떤 몸의 공기는 이제 정처 없을 여행자의 흔적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임선이의 작업은 또렷한 경계가 사라지고 점차 몇 번을 되뇌어야 하는 시어들과 마주한다. 연속적인 산문이 아닌 시의 행간으로만 이미지를 파악될 수 있도록 띄엄띄엄 찬찬하다. 이젠 전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전체를 보여야 할 책임도 의무도 없다. 시선이 있어야 할 곳에 시선을 아끼지 않고, 새를 띄워야 할 곳에 새를 띄운다. 또 빛과 숨이 드리워야 할 곳에 숨을 쉬게 하고 시간이 필요한 곳에 잠시 그곳으로 여정을 안내할 뿐이다. 전체를 획득하려 했던 막연한 물질성과 시간성은 오히려 전체성을 흐트러뜨리며 늘 미끄러져 가방을 싸매고 떠나는 그저 여행자의 기념적인 기억으로만 선명하다. 이 느슨한 시적인 행간은 근 몇 년간 이어온 가족사와 연관된 개인의 깊은 시간의 방증이다.

임선이의 작업은 늘 ‘시간이 관여한 몸’과 ‘몸에 깃든 시간’에 천착해 왔다.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의 실존을 매번 작업에 담아왔다. 초기작업으로 선인장의 모든 가시를 공들여 떠낸 시멘트 조각작품 부터 화분을 수 없는 각도로 포착해 겹쳐낸 사진 작업 , 지도의 등고선을 켜켜이 쌓은 작업 <극점 2014>까지 이 무던한 시간의 고리에 몸을 던져 이겨내려 했던, 소리 없는 격분의 전투장에서 그가 실제로 획득한 건 그저 ‘불완전한 시간’일 것이다. 그간 쏟아냈던 작업들은 문장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동일성’의 항해를 거부하듯 ‘연’이란 단위로 느닷없이 줄을 바꾸고 연속성이란 자체에 균열을 내어 각각 감각했던 것들을 짧은 쇼트와 롱 테이크로 드러낼 뿐이다. 어차피 이미 그들/그것은 시간의 둥지 안에서 연속적인 서사로 변주될 테니까 말이다.

이번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펼쳐놓은 <바람의 무게-#여행자의 시간>전은 4개의 장면/공간으로 연출되었다. 각기 다른 장면, 다른 시간은 흡사 다른 의미로 환기될 수 있지만, 실재와 부재의 회로로서 넘나드는 길이다. 먼저 사진 작업으로 살굿빛 벽면에 걸린 대형사진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안을 정리하면서 만든 시간의 기록들이다. 누군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것은 다시 남겨진 자에게 생경했던 파편의 시간으로 배치되고, 그 과정은 늘 연속과 불연속의 시간으로 직조되어 쇼트와 쇼트의 연쇄적 과정으로 배태된다. 또 삶이라는 긴 사건이 굵게 빠져나간 장소를 찍어낸 사진은 곳곳에 다시 흔적이 쌓여 그가 전하려는 부재의 극점이 된다. 프루스트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맛본 순간 돌연 어느 유년의 시간으로 이끌어지듯 그 마들렌의 기호는 그가 찍어낸 사진 안 시간의 주름이며, 얼룩이며, 냄새의 부재이다. 쌓여진 옷과 수많은 몸의 형태가 깃든 만큼 이들의 기호는 얼마만큼 한동안 많은 기억으로 이끌어질 것인가 하는가의 ‘비자발적’ 생성은 늘 작업의 ‘다른 곳’으로 이끈다. 의미로서 실재와 부재가 겹쳐진 이 사진 작업에는 그의 또 다른 작업과 접속으로 연결된다.
물론 이와는 전혀 다른 방법론과 형상의 작업이지만 <부조리한 풍경 2007>과 <극점 2014>에서도 그 의미가 발견된다. 수천 장의 지도를 등고선대로 오리며 쌓은 산 형상의 양극과 반대로 수천 장의 오려진 등고선을 쌓은 협곡 모양의 음극은 필자가 보기에 곧 ‘실재와 부재’의 임계를 단적으로 드러낸 작업으로 <여행자의 시간 시리즈 2021> 작업과 넓은 의미에서 유사한 문맥으로 접속/생성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서 간주된다. 이렇게 그가 무수히 오려낸 등고선의 양과 음의 지형도처럼 서서히 드러나는 형태는 그간의 시간적, 몸적 작업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작업으로 공명된다. 이로 임선이의 작업들은 자신이 시간 속을 걸으며 보이지 않게 슬그머니 젖어 들게 했던 타자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며, 포착된 대상과 시간에 대해 결코 놓치고 지나쳐서는 안 되는 기억에 대한 그의 예대이다. 몇 년 전 동일공간에서 전시되었던 <양자의 느린 시간>에서 선보였던 노년의 아버지의 삶을 반추한 사진 작업 <유토피아 2019> 연작과 오래된 샹들리에의 빛으로 그려냈던 <숨의 말 2020> 역시 개인의 찬란한 시간의 실재와 부재의 역설을 포섭하고 있는 것에서 무관하지 않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크게 그려내고자 한두 개의 큰 축으로 ‘실재와 부재’는 그의 시간의 고리에서 늘 염두에 둔 주제이다. 그의 말처럼 섬광처럼 찾아온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어떤 기억의 전후를 끊임없이 요동치게 하는 중층의 함의를 담아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습관화된 관습적 시각의 중심을 늘 흔들어대던 작업에서 최근 개인의 사건을 담아내는 작업으로 이행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시적인 <바람의 무게>를 담은 정처 없는 시간성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지하 전시장의 작업들은 이 실재와 부재가 교차하면서 받아들이는 일련의 초월적 과정을 담아내려는 공간이다. 먼저 <검은 달-달과 그림자가 만나던 날> 작품은 천장에서 내린 수반을 붙인 집어등과 바닥에 흑경이 설치된 작업으로 들숨과 날숨을 쉬는 이상의 신호로 상징되며 은유된다. 둥근 흑경의 검은 바다에 닿은 등대의 빛이 일치와 불일치의 반복하며 떠난 여행자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시간의 차원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이 집어등의 작품은 숨 쉬듯 내뿜는 따뜻한 불빛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앞선 전시 <품은 말과 숨의 말>의 화려하고 견고했던 샹들리에의 숨 쉬는 듯 고요한 빛과 연동된다. 이 모호한 흐릿한 빛은 망망대해의 아득하고 불가능한 시간을 선명하게 하고, 아무것도 감각되지 않고 보이지 않을 시간을 가시화시킨다. 생의 찬란함의 은유를 다른 어떤 세계로 보내고자 신호하는 아주 엷은 생성의 빛처럼 말이다. 또 다른 방이다. 영상 속의 그림자는 새장처럼 나타났다 다시 새장의 그림자처럼 빙빙 돌며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 어슴푸레한 행간이 긴 시어처럼 드러나는 새장/그림자는 부재에 대한 어떤 막연함이다. 그가 아주 오랜 시간 두드려 편 검은 쇳덩어리 깃털과 한 낫 깃털 같은 찰나의 평면적 의미를 담으려는 사이의 이중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독해는 어긋나 있고, ‘늘 삶과 시간은 총체적으로 불일치’함이 표명되고 있는 것이다. 거의 제로에 가까운 칠흑의 검은 깃털은 오히려 선명한 그림자의 형상으로 의식/무의식으로 또렷이 다가오고 그 어둠의 진위를 깊숙이 들여다보게 한다. 빛을 등진 반대편의 그림자 같은 이 작업은 그가 어느 전시에서도 선보이지 않았던 작업 중 병과 컵, 작은 상자 등 사물들에 유화물감을 덧바른 작업에서 또 선명해진다. 어떤 그림의 대상으로서의 소재에 실재 물감을 덧바른 이중의 헛됨은 과연 그가 늘 불완전으로서 바라보려는 어떤 대상 혹은 대상에서 초월하려는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하나의 사례이다.

마지막 방의 작품으로 공간에는 푸른 이끼가 깔리고 화려한 깃털로 감싼 원형의 새가 중력을 거스르며 떠 있고 또 이끼 틈에 앉아있다. 이 작업은 기꺼이 걸어온 여행자를 위한 이상향의 공간처럼 환기된다. 아무런 습기도 바람도 불지 않는 창문 없는 공간, 그저 아득하게 하는 기억만이 생성하는 무의식의 공간이다. 그저 푸른 이끼가 자라고 날개 없는 새가 사는 망각되지 않은 시간만이 존재하는 공간일 뿐이다. 각기 다른 몸의 기억을 지닌 깃털과 또 각기 다른 땅의 숨과 기억을 가진 푸른 이끼들은 다른 현실로의 이동을 가능케 하는 기호이다. 공간의 넓은 그릇에 담긴 서로 다른 미시적인 기억들은 늘 떠올린 내면의 기억들과 마주하며 그의 의미심장한 말 ‘무엇이 알지 못하는 이곳으로 나를 데려(이끌어) 왔다’라고 회고된다. 이 기억 주체에서 발현되는 우울하지만 찬란한 시선과 의미의 시간을 이곳을 통해 전화시키고자 하는 그의 몸적인 의지이며 파안의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이는 푸코의 미완적 헤테로토피아의 시선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의미와 불온한 이 세계를 반박하고자 하는 세계로서 말이다. 몸의 모든 세포들이 널뛰며 기억을 담아낸 무수한 깃털의 새와 이끼모들은, 그것만으로 그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이상향이 되었을까? 만약 이 새와 이끼모로 효과가 만들어낸 이상향의 세계가 없었다면 어떻게 이 <바람의 무게>가 해독되었을까?

다시 나무 액자에 담긴 사진으로 돌아간다. 사진 안 집안의 모습은 이젠 하나의 롱테이크가 될 기억으로 혹은 사건으로 남는다. 여행자의 시간과 일상이 담겨진 또 다른 여행자의 기억이 존재하며 사라지는 그런 부재의 공간으로서, 또 ‘받아들이는 몫’으로 실재/부재하는 모든 것들을 경계에 초대하듯 흥미진진이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그 시간의 온전함을 흔쾌히 수락하는 것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작업들이 늘 완전하리라 했던 실체에는 불완전한 눈으로, 불완전한 모호한 것에는 몰입하는 몸으로 해체하듯이 독해의 독해를, 차이의 차이를 거듭한다. 얄궂게 빛을 비추고 손의 감각으로만 만져 볼 수 있는 그의 새하얀 초대장처럼 말이다.

기간
2021-11-23 ~ 202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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